[강화도여행] 유유히 흐르는 물길 뒤로 외침에 항거했던 역사를 간직한 곳, 초지진(草芝鎭)
한강과 연결되는 강화해협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 외세침입의 마지막 방어선이었습니다.
촘촘하게 늘어선 진, 보, 돈대는 김포와 강화 해안선을 따라 위치하고 있죠.
소용돌이치는 물살을 앞으로 두고 있는 진지는 구한말, 프랑스와 미국의 서양 군함과 일본 군함을 맞아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운양호사건(1875년)의 격렬한 전투를 치룬 역사의 현장입니다.
700여 년 전, 수많은 병사의 목숨을 앗아간 아픔의 장소이지만 현재는 평화로운 모습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초지진(草芝鎭)은인천 강화군 길상면(吉祥面) 초지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조선시대에 해안선을 지키기 위하여 설치한 요새입니다.
김포군 대명리와 초지대교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는 초지진은
성곽의 둘레가 500m도 안 되는 작은 규모의 방어시설입니다.
조선 말기, 한양으로 향하는 적군의 침략을 저지하는 군사적 요충지였던 이곳은
병인양요(1866년)와 신미양요(1871년), 운양호사건(1875년)을 거치며
외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조선군의 붉은 피가 물들었던 역사의 아픔이 서려 있는 곳이죠.
당시 격렬한 전투의 흔적은 성곽 입구의 소나무의 포탄 흔적이 되어 아직도 남아 있습니다.
1679년 조선 숙종 때에 세워졌던 초지진은 수많은 전투로 완전히 소실되었고 1976년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답니다.
이곳 강화해협에는 안타까운 사연의 이야기가 전하고 있죠.
돌아나가듯 굽이도는 강화해협의 물살은 ‘손돌목’이라 불립니다.
원나라의 공격으로 강화도로 임시 수도를 정한 고려의 국왕 고종이 손돌이라는 뱃사공의 나룻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려 하다 거꾸로 흘러가는 배의 방향을 보고 적의 첩자로 오인하여 그를 참수하였습니다.
손돌은 마지막 순간 흐르는 물살에 바가지를 띄워 이것을 따라가라 유언하였고
흐르는 물살을 따라 거꾸로 향하던 바가지는 강화도의 해안으로 안전하게 나룻배를 인도하였다고합니다.
지금까지도 손돌의 생일인 음력 10월 20일 무렵 불어오는
매서운 강화해협의 바람은 억울한 죽음을 당한 손돌의 영혼이 실린 ‘손돌바람’이라 불린답니다.
홍이포(紅夷砲)
명나라 때 네덜란드의 대포를 모방하여 만든 중국식 대포입니다
강화도의 여러 포대와 진·보에는 홍이포(紅夷砲)가 전시되어 있는데
모조품이 아닌 진품은 초지진(사적 제225호)의 홍이포 하나뿐이라고합니다.
조선 영조 때부터 주조하여 사용한 포구장전식 화포로,
길이 2.15m·무게 1,800kg·구경 100mm이며 사정거리는 700m라고합니다.
폭발하는 힘으로 포탄은 날아가지만 포탄 자체는 폭발하지 않아 위력이 약햇다고 하네요.
일제시대 관리 사택의 기둥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제자리로 찾아 옮긴 것이라고 합니다.
강화도에는 유독 진(鎭), 돈대(墩臺), 보(堡)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군사시설 유적이 많이 있습니다.
과연 그 차이는 무엇일까요? 각각의 의미를 보면
진(鎭)은
해상으로부터 침입하는 적을 막기 위해 지은 요새,
돈대(墩臺)
성곽이나 변방의 요지에 구축하여 총구를 설치하고 봉수시설을 갖춘 방위시설
보(堡)는
해안선을 지키는 중요한 요새로 해안선을 따라 지은 석성이랍니다.
규모로 보면 보가 제일 크고 그 보(堡)의 소속으로 돌을 원기둥형으로 쌓아
곳곳에 총구멍을 설치하고 위에는 낮은 성첩(城堞)을 쌓은 돈대(墩臺)가 설치되었답니다.
그리고 요충지마다 별도의 소규모 요새인 진(鎭)이 있었던 거죠.
강화도는 구한말 외세의 침략과 개항요구에 온몸으로 맞선던 곳입니다. 그래서 많은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죠.
구한말 대표적인 외침사건에 대해서 한 번 알아보겠습니다.
병인양요(丙寅洋擾)
1866년(고종 3) 10월, 흥선대원군의 천주교도 학살 ·탄압에 대항하여 프랑스함대가 강화도에 침범한 사건입니다.
프랑스군은 강화도에서 철수하면서 장녕전(長寧殿) 등 모든 관아에 불을 지르고
앞서 약탈한 은금괴와 대량의 서적 ·무기 ·보물 등을 가지고 중국으로 떠났죠.
이로써 세계정세에 어두운 대원군은 그 기세를 돋우어,
척화비(斥和碑)를 만드는 등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을 더욱 굳히고, 천주교 박해에도 박차를 가하였답니다.
신미양요[辛未洋擾]
1871년(고종 8) 미국이 1866년의 제너럴셔먼호(號) 사건을 빌미로 조선을 개항시키려고 무력 침략한 사건입니다.
미군은 6월 10일 군함 2척을 앞세우고 육상 전투대원 644명을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시켜
무력으로 점령하고, 이어 덕진진 ·광성진을 차례로 점령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군은 조선정부를 상대로 위협적인 외교적 수단으로 조선을 개항시키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일본으로 철수하였죠.
운요호사건[雲楊號事件(운양호사건)]
일본 군함 운요호가 포함외교(砲艦外交)의 일환으로, 1875년 9월 20일 조선 해안을 탐측 연구하기 위해 왔다고
핑계를 대고 강화도 앞바다에 불법으로 침투하여, 초지진으로 부터 방어적 공격을 받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함포공격을 가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조선수군을 공격하고 인적·물질적 피해를 입히고 퇴각한 사건입니다.
그 결과 이듬해인 1876년 2월 26일 ‘강화도조약(江華島條約)'을 체결하였고, 조선은 일본에 개항을 하게 되었죠.
고려시대 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숱한 외침에 시달려야 했던 강화도,
세월이 흘러 이제는 그 흔적조차 미미하지만 당시의 기록들을 돌아보며 평화의 소중함을 다시 생각하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