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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가수답지 않은 가수, 그러나 너무나 친숙한 사람!

사람들

by 강물처럼~ 2011. 7. 28.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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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가수답지 않은 가수, 그러나 너무나 친숙한 사람!

 

7월 26일 밤, 학습지 재능교육지부 문화제가 끝나고 난 뒤, 뒷풀이 자리에서 김성만 동지를 만났다. 장마가 끝나고 무더위가 계속되더니 마치 물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폭우가 퍼붓는다. 김성만 동지는 우리에게 참 친숙한 동지다. 사실 김성만 동지를 보면 누구라도 한 번 쯤은 야, 나도 가수할 수 있겠다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김성만 동지의 노래에는 노동자의 삶과 애환과 진솔함이 묻어난다. 재능지부 농성장 근처 식당 한 켠에서 김성만동지를 만나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었다.

김성만 동지는 언제부터 노래를 하였고, 그전에는 어떤 일을 했을까? 이 첫질문을 시작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동지는 84~5년경부터 노동자노래패모임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삼익악기에서 조각일을 하며 기계목수일을 배웠고, 가구공장에서 일을하다 14주 산재를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민주노총 여주이천양평지구협의회 문화부장을 하게 되었고, 근로복지공단 이용석열사 투쟁문화제에서 우연찮게 땜방(?)가수로 출연한 게 계기가 되어 계속 노래를 하게 되었단다.

 

“처음에는 투쟁현장에서 잘 불러주지 않았죠. 사실 문예활동가들 사이에서는 처음에 저를 가수로 인정해주지 않았어요. 대체적으로 민중가수들이 라이브를 하기 때문에 노래를 잘합니다. 그런데 저 같은 사람을 자기모습하고 다르지 않게 노래하는 사람을 대중들이 처음 본 것이죠. 그때부터 유일하게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나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비정규직 동지들은 사람 하나하나의 개성도 존중해준 것이죠. 비정규직 투쟁에 찾아다니면서 자랑스러웠던 것이 이랜드 투쟁이었습니다. 이랜드 총파업이 벌어지긴 1년 전 까르푸 중계점 농성장에 함께 연대하기 시작했는데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스머프 투쟁이 된 거죠.”

김성만동지는 우리에게 비정규직철폐연대가를 만든 사람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예전에 불패의 전사라는 노래를 쓰고 전노협 노래 대상을 받은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나 정작 김성만 동지는 굳이 투쟁가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투쟁가보다는 어쿠스틱 포크 음악을 하고 싶어 했단다. 그런데 집회현장에서 어떤 동지가 구호를 외치는 모습을 보고 비정규직철폐연대가를 쓰게되었고, 나의 손 높이 솓구쳐라는 가사가 만들어졌다고 했다.

 

“나중에 이곡을 보고 음악을 하는 한 동지가 전율을 느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한말이 무척 재미있어요. 이곡을 쓴 사람은 천재이거나 음악을 전혀 모르거나 둘중에 하나일 것이다라고 했다더군요. 난 사실 체계적으로 음악을 공부한 사람이 아니고 감으로 음악을 만듭니다. 그러니 후자인 셈이죠. 그리고 많은 동지들이 이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면서 이제는 이 노래가 모두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난 내 노래의 저작권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내 것이 아닌 동지들의 것이 된 것 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하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건설노조와의 인연으로 이야기가 이어졌다. 예전에 골프장 한원CC투쟁을 하면서 경기보조원이란 노래를 만들었는데 그때 그 노래를 들은 타워크레인동지가 자기들 노래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단다. 그래서 타워노래를 만들기 위해 자료를 받았는데 그때 받은 타워노보 제목이 하늘로 출근하는 사람들이었다. 이것이 건설노조와 관계 맺게 된 계기라고 했다. 타워노래를 만들고 나서 동지들이 30만원을 줬는데 받지 않았다고 했다. 노래를 한곡 써서 음반에 넣는데 100만원이 넘게 든다고 한다. 하지만 김성만동지는 본인이 좋아서 쓴 곡이기에 돈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덤프야 가자라는 노래도 사연이 참 재밌었다. 덤프연대 동지들이 가열차게 투쟁하는 모습을 보고 노조에 전화를 해서 덤프에 대한 노래를 썼다고 했더니 건설노조가가 있으니 굳이 없어도 된다는 대답을 들었단다. 그래서 어차피 만든 노래니, 집회에서 동지들에게 악보를 나눠주고 한 번 부르겠다고 했는데 공연 마치고 나서 동지들이 자기들 노래를 만들었다고 너무 좋다고 폭발적인 반응을 보여줬다고 했다. 굴삭기에 대한 노래도 만든 것이 있는데 음원화 하는데 돈이 너무 많이 들어서 작업을 못하고 있다고 건설노조에서 이 부분에 대해서 좀 생각해 줬으면 한다는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덧붙여 전기원 노동자와 목수들의 노래도 만들고 싶다고 이야기 했다.

 

“현장에서 동지들이 투쟁하는 모습을 보면 가사가 떠올라요. 좋은 노래가사는 그 안에 노동자들의 모습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하거든요. 타워는 타워의 모습, 덤프는 덤프의 모습이 있어야죠. 이후에는 건설노동자들의 삶, 애환의 모습, 꼭 진군가가 아니더라도 건설노동자의 살아가는 모습이 담긴 음반을 하나 만드는 것도 내 노래 꿈의 기획 속에 하나가 있습니다.”

김성만동지의 노래 중에서 감자탕이란 곡을 현장의 노동자들이 무척좋아한다. 이 노래를 만들게 된 계기를 김성만 동지로부터 들어봤다.

 

“집회를 마치고 동지들과 감자탕집에 간 적이 있습니다. 감자탕을 먹는데 동지들이 살을 발라먹고 뼈를 버리는 모습 속에서 아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비정규직이 이렇게 버려지면 않된다, 이런 생각이 순식간에 떠올랐어요. 그래서 이게 노래가 되야 된다, 어떤 리듬으로 만들까 고민을 하다 레게 리듬에 담아야 겠다고 생각했죠. 레게리듬은 저항의 리듬이입니다. 저항의 정신, 항전의 정신, 그래서 레게리듬으로 만든 노래가 감자탕입니다.”

최근에도 김성만 동지는 계속해서 곡을 만들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최근에 현장에서 많이 부르는 앗싸, 가오리란 노래가 만들어진 계기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이용석열사 추모사업회에서 비정규노동자상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열사 생가에 초대받은적이 있었는데 흑산도에서 더 들어간 섬이었단다. 가는 길에 흑산도를 들렀는데 홍어를 보면서 떠올라 쓴 곡이 앗싸, 가오리란다.

 

“아 우리가 너무 많이 싸구려로 구조조정 당하고 있다, 그래서 이걸 해학적으로 풍자해서 마당굿에서 광대처럼 웃게, 울게 한번해보자해서 만든 곡입니다.”

요즘은 주변의 문예활동가들과 함께 현장으로 찾아가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다고 했다.

 

“처음에는 잘 않될거라 생각했는데 문예 활동하는 동지들이 너무나 호응을 많이 해줘서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공연을 하고 있습니다. 현장 동지들의 반응도 너무나 좋아요. 정말 어렵고 힘든 현장은 돈이 없고 음향도 제대로 없어서 집회에 공연하는 동지들을 부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문예활동가들이 스스로 찾아가는 공연을 계속해서 할 계획입니다.”

 

마지막으로 문예활동가로서 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사실 힘들고 어려운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다른 답을 들을 수 있었다.

 

“난 집회에서 대접받는 사람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다. 그냥 현장의 노동자들과 똑 같이 대해 줬으면 좋겠어요. 최근에 노래를 하고 싶어 하는 젊은 동지에게 해준 말이 있습니다. 노래를 하고 싶으면 궂은일을 먼저 해라, 동지들과 먼저 친해져라, 그들이 무엇을 하든 같이해라, 궂은일 하지 않으려면 노래하지마라, 그리고 마지막 남아서 딱가리해라라고 했어요. 난 스스로 딱가리가 되고 궂은일 하는 것을 마다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것이 문화가 가지고 있는 마지막 정리하는 힘, 이게 문화가 가지고 있는 가장 큰 힘, 그것도 예술인거죠. 그냥 현장으로 노동자들 속으로 묵묵히 가면 우리를 철저하게 챙겨주는 것은 현장노동자들입니다. 정말 고맙게 챙겨줘요. 난 영원한 딴따라, 영원한 마당쇠가 되고 싶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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