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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여행]면암최익현선생의 유적지 모덕사 - 유교의 충효사상에 가려진 민초의 눈물....

길, 떠남, 회상, 그리고...

by 강물처럼~ 2013. 3. 1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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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산으로 여행을 가는 길, 충남 청양의 모덕사를 찾았습니다.

모덕사는 구한말 의병전쟁시기, 의병장이었던

면암최익현 선생의 사적지입니다.

최익현 선생은 74세의 늙은 몸으로 의병을 일으켰으나

고종황제의 칙령을 받고 의병을 해산했고,

이후 일제에 의해 대마도의 감옥에 갇혔죠.

투옥당시 "쌀 한톨, 물 한 모금도 왜놈 것을 먹을 수 없다" 며

단식을 하다 순국하였습니다.

 

이것이 역사적으로 알려진 사실이며 우리가 역사책에서 배운 내용입니다.

유교적 충효사상에 입각해서 본 다면 의병항쟁을 하다 황제의 명에 따라

의병을 해산하고 결국 대마도 감옥에서 단식을 하다 죽음을 맞이한 최익현 선생은

분명 애국자입니다. 또한 빼았깃 나라를 되찾기 위해 일제에 항거한 선생의

충절은 높이사야겠죠.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훌륭한 충신일 수도 있으나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주자학에 심취한

고루한 유생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듭니다.

 

 

 

당시는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고 사법권과 외교권을 틀어지고 조선을 식민지화 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기입니다.

수많은 민초들이 의병항쟁에 나섰고 일제는 남한 대토벌이라는 대대적인 살인 만행을 저지릅니다.

우리는 이 시기를 의병전쟁기라고 부르죠.

의병장들은 초기에 양반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했습니다.

하지만 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평민출신의 의병장으로 대체됩니다.

주자학을 익힌 유생과 양반출신의 의병장들은 평민출신 의병장들의 용맹을 달갑잖게 생각했으며

많은 부분에서 유교적 신분질서를 내세우며 평민출신의병장을 억압했습니다.

결국 이로 인해 기껏 의병을 일으키고도 평민이나 상놈들과 함께 할 수 없다며 의병을 자진해산해버린

의병장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면암최익현 선생은 고종황제의 칙령을 받고 의병을 해산합니다.

그러나 당시의 칙령은 의병항쟁을 약화시키고 말살하기 위해

일제가 고종황제를 총칼로 협박하여 칙령을 내린 것입니다.

결국 최익현 선생은 유교적 충효사상에 입각하여

황제의 칙령을 충실히 받듭니다.

하지만 의병해산이후 의병항쟁을 했던 대부분의 유생과 양반들은

양반이라는 신분과 가문의 배경으로 무사하게 살아남습니다.

이것은 일제가 조선 통치를 위해 양반층의 조력을 얻기위한 배려가

작용한 것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국충정하나만으로 맨몸뚱이로 일제에 맞섰던 숱한 민초들은

일제의 총칼에 의해 희생양이 됐습니다.

일제의 간교함을 간파하고 의병해산을 거부하고 항쟁을 주장했던 일부 의병장들은

대다수의 양반출신 의병장들에게 황제의 명을 거부한 불충한 자로 낙인찍혔죠.

결국 의병해산을 주장하며 일제에 의해 강압된 황제의 칙령을 받든 양반의

빈자리를 메우며 의병전쟁을 이어간 사람들은 일부 양반출신 의병장들과 의병항쟁의

주축인 농민과 상민들이었습니다. 

 

 

 

 늙은 몸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황제의 명을 받들어

의병을 해산한 이후, 감옥에서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단식을 하다 순국하신 면암최익현선생의 충절은 훌륭한 것입니다.

그러나 철저히 유교적 신분질서에 얽매여, 대다수의 평민출신 의병들의 목숨보다는

황제의 칙령을 더 우선히 한게 과연 옳은 것일까요?

면암최익현 선생의 유적지인 모덕사,

모덕사의 뜻은 면암의 덕을 흠모한다라는 내용이라고 합니다.

이곳을 둘러보며 진정한 덕이란 무엇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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