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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한라산 관음사

길, 떠남, 회상, 그리고...

by 강물처럼~ 2012. 12. 1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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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비가 내려 온 땅을 적신 가운데 한라산 관음사를 찾아갔습니다.

제주시 한라산 동북쪽 기슭 산천단(山川檀)에서 3km 떨어져 있는 곳에 위치한 관음사,

제주도내의 40여개 말사를 관장하는 본사입니다.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길, 삼나무 숲이 펼쳐져 있고 좌우로 미륵불상이 세워져 있는 것이 상당히 이국적입니다.

개인의 시주를 받아 조성했다고 하는데, 자세히 보면 불상 하나하나의 형상과 표정이 조금씩 다릅니다.

 

 

 

 

 

 당 5백, 절 5백이라던 제주섬. 조선시대 숭유억불 정책과 맞물리면서 제주에서는 당과 절이 수난을 당해왔습니다.

그 수난이 절정에 이른 것은 조선 숙종 1702년 이형상이 제주에 목사로 와 있던

1년 3개월의 짧은 기간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 당시 억불정책으로 인해 제주의 사찰들이 완전히 폐사되었고

이로부터 200년간 제주에는 불교와 사찰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제주도에 불교가 최초로 전래된 시기는 한반도에 귀속되기 전인 탐라국 시대 해로를 통해 남방불교가 전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정된다네요. 관음사는 불교전래 초기에 창건되어 발전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 근거는 제주의 여러 가지 설화, 전설, 민담에 관음사를 괴남절(제주 방언으로 관음사), 개남절, 동괴남절, 은중절이라고 민간에 유포되어 전해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구전에는 관음사가 고려 문종(1046~1083)때 창건되었다고 전해집니다.

 

 

 

 

절집 가운데 자그마한 연못이 있습니다. 여기에 비친 절집의 반영이 또한 절경이죠.^^

 

 

 

 

 

 

 

 대웅전입니다. 예전에는 검은색 기와 였는데 기와 불사를 하면서 황금색으로 바꿨다고 하네요.

상당히 이국적인 풍경입니다.

 

제주 불교가 다시 재건된 것은 1908년 10월 비구니 해월 스님이 현재의 위치에

옛 관음사를 복원하면서 부터라고 합니다. 하지만 시련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제주 4.3 항쟁 당시 토벌대는 1948년 10월,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떨어진

중산간 마을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벌였죠.

토벌대는 중산간의 건물을 무장대가 이용할 수 없도록 부수거나 태워버린 것입니다.

관음사 또한 예외가 아니었답니다. 금강문을 비롯해 대부분 절집이 당시 불태워졌다고 합니다.

 불상은 스님들이 옮기기도 했지만 탱화와 집기 등은 이 시기에 대부분 사라졌답니다.

불교 문화재가 남아있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하네요.

 

 

 

 

 절집 뒤편 언덕에 많은 불상들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다른 곳에선 보기 힘든 광경이죠.

 

 

 

 

 

 

 

 

 

 

 

 

 

 

 

 

 

 

 

 

 

 

 

 

 

 수많은 불상의 군집속에 자그마한 동자승 불상이 자리잡고 있네요.^^

 

 

 

 

 

 

 

 

 

 

 

 

 

 

 

 

비구니스님으로 관음사를 재건하면서 제주 불교의 중흥을 이끈 해월당 봉려관 스님은 

법정사 스님들을 중심으로 일어난 제주 무오항일항쟁에 활동자금을 지원하는 등 상당한 역할을 하셨다고 합니다.

 

 해월당 봉려관 스님꼐서 3년간 수행하신 토굴입니다.

 

 

여기서 잠깐 제주 무오항일항쟁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중원으로 불리는 서귀포시 도순동의 법정악에는 일제강점기인 1911년 법정사가 창건됐습니다.

법정사 창건에 관련된 승려들은 1909년 제주의병항쟁의 의병장으로 나섰던 김석윤을 비롯해

항일의식에 투철한 김연일, 강창규, 방동화 등이었다고 합니다.

마침내 이들은 삼일운동보다 1년 정도 앞선 1918년 4월부터 조직을 구성하면서 거사를 준비했습니다.

김연일이 총지휘를 하고 좌대장, 우대장, 선봉대장, 후군대장을 두어 수많은 참여자들을 조직적으로 관리했답니다.

 6개월 뒤인 10월 7일, 도순리 인근의 하원리, 월평리, 영남리 등의

신도와 주민 7백여명을 이끌고 무장항일투쟁에 나섰다고 합니다.

이들은 "일본인 관리를 제주도에서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한다"는

내용의 격문을 작성해 거사의 목적을 밝혔답니다.

거사 당일 새벽 34명의 선봉대가 깃발과 화승총, 몽둥이를 들고

법정사를 출발해 서호리-호근리-강정리-하원리를 거쳐 중문리로 나아가는 동안

미리 소집해놓은 주민들이 참여하면서 7백여명으로 불어났답니다.

이들은 중문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해 기물을 부수고 주재소 건물을 불태웠다고 합니다.

법정사 무장항일투쟁은 조직을 구성하고 무기를 준비하는 등

6개월여의 사전 준비 기간에도 발각되지 않았고, 거사를 주도했던 인물들이

짧게는 1년 6개월에서 길게는 4년 4개월이나 숨어지낼 수 있었을 만큼 지역 주민들의 호응이 컸다고 합니다.

 

 

자, 이제 관음사에서 나와 다시 속세로 돌아갑니다.

 

 

관음사 일주문 바깥에 큰 대 불상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제주불교는 탐라국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는 주장이 제기될 만큼 오래 전부터 자리를 잡았습니다.

불교가 한창 융성할 때는 마을마다 절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어집니다.

조선시대 불교에 대한 탄압 시기를 거쳐 제주인들이 고통을 겪어야 했던

역사적 수난기에 제주의 불교 또한 고난을 당해야 했습니다.

폐사지로 버려졌던 관음사가 지금의 사찰로 자리 잡은 것은 100여년 안팎의 일입니다.

지나간 역사를 밟아 온 관음사. 그것은 비운의 섬 제주가 걸어온 슬픈 역사와 닮은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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