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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가루, 설탕, 커피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길, 떠남, 회상, 그리고...

by 강물처럼~ 2013. 1. 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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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정리하다 작년 연말 제주도 올레길을 걸을때 종달바당에서 들렸던 카페사진을 찾았습니다.

사진을 보면서 우리는 커피를 언제부터 마시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마침 예전에 이에 관해서 썼던 글이 있어 함께 올립니다.

 

밀가루, 설탕, 커피는 언제부터 먹었을까?

밀가루, 설탕, 커피, 이 세가지는 이제 누구도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기호품이자, 우리 식생활의 주원료이다. 특히, 현대인들에게 커피와 설탕은 일상 생활의 주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할머니 세대에게도 밀가루, 설탕, 커피가 주요 식료품이었을까? 아니다. 그렇다면 이 세가지는 언제부터 우리 생활과 떨어질 수 없는 먹거리가 되었을까? 그 유래를 더듬기 위한 과거로의 여행은 그리 먼 시기까지 올라 갈 필요가 없다.

밀은 신라나 백제 유적지 등에서 탄화된 밀이 발견되는 등, 삼국시대부터 이미 재배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우리의 옛 음식종류에도 밀가루를 주원료로 사용한 음식은 밀전병·유밀과 같은 별식이나 간식 또는 누룩과 같은 특수한 용도로 쓰여지고 있어 상당히 귀한 곡물이었다. 이렇게 귀한 밀이 우리 주식으로 변화하게 된 것은 한국전쟁이후 미국으로부터 원조물자의 하나로 대량으로 들어오면서 국수로, 빵으로, 또 수제비로 먹거리화 되면서부터이다.

설탕에 고려 명종 때 송나라로부터 후추와 더불어 들어왔는데 약재로만 사용하다가 일부 상류층의 사치스런 기호품으로 이용되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단맛을 내는데 주로 꿀이나 조청을 이용했다. 오늘날 설탕이 대중식품으로서 보급되기 시작한 것도 한국전쟁 이후였다.

약 7세기 경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의 양치기 소년 칼디에 의해 발견되었던 커피가 세계 사람들의 기호품으로 대중화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스턴트 커피가 생산되면서부터였다. 우리들에게 커피가 일반화된 것도 당연히 그 이후였다. 커피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시기는 1882년(고종 19년)부터 였는데 아관파천 때에 고종은 커피를 즐겼다고 한다. 고종이 러시아공관에 있을 때 식사시중을 하던 손탁에게 호텔을 지어주었는데 여기에서 우리 나라 최초의 다방이 생겨 커피를 팔게 되었다. 인스턴트 커피는 전쟁 중에 미군 PX를 통해 불법적으로 암거래되었고, 여기에 막대한 외화 유출 현상이 나타나자 정부는 국내 커피업체의 설립을 허가하였다. 커피를 마시던 초기 다방은 주로 전상(戰傷)의 아픔과 허무에 가슴 비빌 데 없던 젊은 문학예술청년들이 대개 손쉬운 단골다방을 정해 놓고, 한담도 나누고 연락처로 활용되기도 하였다.

밀가루·설탕·커피가 대중식품이 된 것은 1950년대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렇다면 1950년대에 이들 식품이 어떻게 대중화될 수 있었는가? 해방과 동시에 진주한 미군정은 한반도에서 민중의 저항을 억누르고 경제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한국에 원조를 했으며 정부수립이후에도 계속 이루어졌다. 미국의 경제원조는 국민경제의 확대재생산을 가져올 수 있는 생산재공업의 건설에는 그다지 할당되지 않았고, 대부분이 완성소비재와 외국산 원재료를 가공하여 판매하는 소비재 가공업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세계 최대의 밀 생산지였던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후 계속된 농업공황을 벗어나기 위해 한국을 비롯한 외국에 대한 원조를 자국의 농민을 위한 잉여농산물 처분수단으로 사용하였으며 원조국의 경제구조는 고려대상이 되지 못했다.

이러한 농산물을 중심으로 50년대 공업화를 주도한 부문은 삼백(三白)산업이라 하는 밀가루, 설탕, 섬유 등의 완전소비재공업이었다. 그러나 삼백산업의 원료는 값싼 잉여농산물로 충당되어 국내의 농업생산을 도태시켰다. 밀의 자급도는 1955년 70%이던 것이 1958년에는 겨우 25%를 충당했고 급기야 1986년에는 0.2% 정도로 감소하였다. 또한 면방직공업의 원료로 남도의 들녁을 하얗게 수놓았던 목화밭도 목화밭에서 남녀의 사랑을 노래했던 대중가요도 이젠 사라지고 미국코튼사 면화가 최고품으로 선전되고 있다.

밀농업은 쇠락의 길로 빠진 반면 밀을 주원료로 하는 제분사업은 제당사업과 함께 50년대 완전소비재공업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제일제당의 성공을 토대로 오늘날 대재벌이 된 것이 바로 삼성의 이병철이다.

밀, 설탕은 각각 대제분업자, 제당업자에게만 배정됨으로써 가공시설을 보유한 자본가들은 싼 가격으로 소요원료를 독점적으로 확보하였다. 제분은 대한제분, 조선제분, 제일제분 등이 50%이상을 차지하였고 제당은 제일제당이 3분의 2 이상을 차지하고 나머지 동양제당, 삼양제당, 한국제당 등이 차지했다. 이처럼 제당·제분사업은 몇 개 재벌에 의해 독점적으로 장악되었으며 독과점은 자유경쟁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정부의 정책적 비호하에 처음부터 중소기업을 배제하면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편 국내에서 커피는 1968년 미원음료의 전신인 MJC에서 생산한 원두커피가 시초였으며 2년 뒤 미국 제너럴푸드사와 합작한 동서식품이 레귤러 커피를 개발해 커피시장에 합류하였다. 다방에 의해 커피문화가 전개되던 초기에는 원두커피가 주종을 이루어 왔으나 곧 인스턴트로 바뀌기 시작하였고 주로 인스턴트 커피를 생산해 온 동서식품이 70%의 시장을 점유하였다.

우리는 식생활의 주원료이자 기호품으로 1950년대부터 밀가루·설탕·커피를 먹기 시작했다. 이들 식품이 우리의 주요 먹거리가 된 것은 농산물중심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경제원조, 삼백산업, 국가의 대자본에 대한 특혜 등으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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